케어베어를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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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그놈의 케어베어가 뭔지 짚고 넘어가자.

 Carebear : PvP를 용납하지 않는 플레이어를 비하해 호칭하는 말.
  출처 : 제시카 멀리건 (2003) 《온라인 게임기획, 이렇게 한다》, 제우미디어.

 지금의 쓸모야 이렇다지만 밑도끝도없이 "저놈의 곰색히들"이 PvP를 용납하지 않는 플레이어를 비하해 호칭하는 말이 되진 않았겠지.

 아마도…


 얘들의 이미지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관련 위키피디아 항목을 참조하라) 현재 Care Bears in popular culture의 첫줄은 "In Video Gaming, the term carebear is used to describe a player (particularly in MMORPG's) who would prefer not to take part in Player vs. Player [PvP] combat in favor of playing cooperatively with other players completing quests and achievements uninterrupted."로 제시카 멀리건의 책 부록에 붙은 케어베어의 용어 설명과 유사하다. 출전이 와우위키인걸로 보아 북미(北美)애들이 주로 사용하는 단어인 것 같다. 케어베어가 원래 미국출신이기도 하고!



 내가 해본 "북미스러운" mmorpg는 길드워밖엔 없다. 그래봤자 국내개발에 국내에서 망하고 미국에서 연명하는 게임일 뿐이지만. 꽤 재미있는 게임인데, 길드워의 PvP특성은 이브온라인과 극과 극을 달린다.

 첫 번째는 죽음. 일반적인 길드워 플레이어에게 죽음은 병가지상사일 뿐이다. 손실이랄 게 없다(*1). 경험치를 잃는 것도 아니고, 장비를 떨어뜨리지도 않고, 시체에 남아있는 아이템을 회수하러 달려야 할 필요도 없고, 착용하고 있던 장비의 내구도가 떨어져 수리를 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브에서의 죽음은 몰고 있던 함선의 전부와 모듈의 일부 혹은 전체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장비. PvP캐릭터를 생성했다면 최고 성능의 장비를 언제든지, 아무 비용 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제작해 전장으로 뛰어들 수 있다(*2) 좀 더 "멋있는" 장비는 존재하지만 좀 더 "성능 좋은" 장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손검을 예로 들면, 아무리 잘난 칼일지라도 데미지는 15-22를 넘길 수 없으며 붙는 옵션도 최대 3개(Hilt, Pommel, Inscription에 붙는 옵션 하나씩)뿐이며, 각 옵션의 상한선도 규정되어 있다. 이브? T2쉽, T3쉽, 팩션, 데드, 그리고 오피서 아이템이 존재한다. 가격도 비싸고, "죽음"앞에서 쉽게 부서진다.

 *1) 타이틀 중 "생존자"타이틀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영구적인" 페널티가 될 수 있겠지만 문맥상 제외한다. 필드에서 죽고 나서 부활한 플레이어는 Death Penalty를 받는다. 하지만 이건 전투 중에만 적용되는 "일시적인" 페널티로, 전투 상황이 끝나면 완전히 해제된다(전투 중에 줄여나갈 수도 있다).

 *2) 물론 봉인해제라는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하여간 길드워는 페널티 걱정 않고 마음껏 PvP를 즐길 수 있는 mmorpg다. 실제로도 꽤 많은 플레이어가 PvP를 즐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vE에 목숨거는 사람이 있었다. 성능은 값싼 장비와 아무 차이가 없지만 간지가 철철 넘치는(혹은 넘친다고 생각하는. 나는 북미 애들의 미적 감각에 회의를 품은 적이 꽤 많다 -_-a) 아이템은 시장에서 말도 안 되게 비싼 값에 거래된다. 룩 요소를 무시하면 1~2ecto정도로도 최고 성능의 아이템 풀셋을 뽑을 수 있지만, 수십 수백 ecto를 들여서라도 간지나는 장비를 맞추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수의 "중산층" 몽크가 VS(Voltanic Spear)와 Tormented Shield를 사용해 방어가 필요한 시점에서 스왑한다. 내가 게임을 때려칠 시점에서 VS+TS 세트 가격은 대략 50ecto. 캐스터들의 로망인 BDS(Bone Dragon Staff)는 내가 보았던 가장 "후덜덜한" 가격의 장비였다. 수백 ecto였으니까. Frog Scepter도 BDS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비쌌다. 이런 후덜덜한 장비들을 위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PvE에 목숨걸었던 것이다. 직접 획득하러 다닐 만큼 한가하지 않은 사람은 Farming을 해서 돈을 모았다. 유튜브에 Farming Guide나 그에 준하는 동영상이 꽤 많이 올라왔으니, 궁금한 사람은 적당한 키워드로 검색해보라. Guild War Farming정도로 검색해 동영상 하나를 찾고, "관련 동영상"들을 뒤적이면 이것저것 많이들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자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PvP에 나설 수 있는 게임에서도 이 지경이었으니, 이브온라인야 오죽하겠는가.



 좋다. 이정도 밑밥을 깔았으니 슬슬 케어베어를 위한 변명을 시작해봐야겠다.



 1. 최소한의 미션능력은 PvP 자금 마련의 밑바탕이 된다.

 모든 PvPer가 잘 나가는 얼라에 소속되어 랫질과 광질만으로 떼돈을 벌지는 않는다. 랫질하기 여의치 않은 날도 있고, 얻는 것보다 잃는 날도 있으며, 터지면 파산에 이를 만한 상황에서 배가 터지기도 한다(이럴 때는 특히 더 잘 터지는 것 같다!). 이 때 엠파에서 4렙 미션을 할 수 있으면 PvP에 필요한 isk를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된다.



 2. PvP를 준비하면서 미션을 할 수도 있다.

 물론 알고 있다. PvE와 PvP의 스킬트리는 많이 다르다는 걸. 그리고 얼마든지 프리깃 끌고 PvP에 나설 수 있다는 걸. 하지만 다양성을 인정하길 원한다면 이 쪽의 다양성도 인정해주었으면 한다. 배쉽 끌고 플릿전 나갈 스킬 치면서 엠파에서 놀 수도 있는거다. 스킬포인트 1밀때부터 종이배 끌고 아우터를 나가야만 꼭 진취적인 플레이어가 되는 건 아니다. 십만원 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밑바닥부터 시작해 성공해야 꼭 진취적인 사회인이 되는 건 아니듯이 말이다.



 3. 미션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무지무지 길게 썼지만 간단한 문장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PvP를 "머릿수 많은 쪽이 와와 몰려가서 다 때려부수고 상황 불리해지면 튀면 되는, 매우 단순한 행위"로 규정하면 당연히 PvPer들은 열받겠지? 마찬가지다. 미션도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4. 데카르트적 모더니티에 익숙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익숙한 건 미션이다.

 초-중-고-대의 16년 코스를 평범하게 이수한 젊은이라면 당연히 데카르트적 모더니티에 익숙하다. 그리고 그 모더니티를 닮은 건 미션이다. 미션은 쉽게 변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좀 더 과학적인" 방안을 찾아볼 여유가 있다. 그 중에서도 이브서바이벌은 이브의 데카르트적 모더니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아이콘이다.

 마이닝, 탐사, PvP는 그렇지 않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기엔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우선 장소가 불확실하다. 미션은 에이전트의 위치가 정해져 있고 에이전트가 던져주는 미션지가 정해져 있지만 마이닝과 탐사는 어디에서 나올 지 모르는 자리를 찾아다녀야 하고 PvP는 어디서 전투가 벌어질 지 모른다. 셋 중에서 불확실성이 가장 높은 PvP는 대처 방안까지 불확실하다. 언제 어떻게 어떤 놈과 싸우게 될 지 예측하기 힘들다. 인텔창이 있고 정찰조가 있더라도 말이다.

 데카르트적 모더니티에 익숙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불확실성은 우선 부담스러움으로 다가온다. 뭐 그렇다고 "한국애들은 백만년동안 미션만 하다 늙어죽어도 정당해요"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일단 이러한 특성을 이해해 달라는 거지… -_-a



 변명은 이쯤 해두고 한국式 케어베어의 문제점을 짚어보도록 하자.



 1. "그래서 무얼 하고 싶은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없다.

 더 빨리 CNR을 타고, 더 빨리 팔라딘을 타서 미션을 돌고 isk를 긁어모아서 무얼 하고 싶은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없다. 이러한 질문이 없는 미셔너의 종착점은 오피서 모듈로 배를 둘둘 말아놓은 다음 퍽치기가 무서워서 0.9시큐 이하로 내려가지 못하는 겁쟁이다.

 미션을 돌아 돈을 벌어 플렉스를 사고, 플렉스로 계정을 연장한 다음 또 다시 미션을 하는 기계적 노동의 반복. 그러자고 이브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5렙 미션 솔로잉에 도전을 하든, 탐사를 하든, PvP에 나서든, 4렙 솔로잉 이후에 무엇을 할 지를 좀 생각해 두면서 게임을 하면 좋으련만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는 가이드를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2. 취향과 팩트가 혼동된다.

 빔이 좋은지 펄스가 좋은지는 취향이다. 각각의 특성이 있으니까. 그러나 엔젤엑바에 빔이 좋은지 펄스가 좋은지는 팩트라고 봐야 한다. 랫의 오빗거리와 속도 등에서 이미 답이 나와있기 때문이다. 터렛의 사정거리를 옵티멀+폴오프까지로 보는 건 취향이다. 옵티멀+폴오프+폴오프까지로 보든 그건 각자 마음이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탄환의 최대 성능이 나오는지는 엄연한 팩트다.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효율적인 렌즈 교체 시점을 알아보기 위해 엑셀로 쇼를 벌이기도 했다는 나의 글을 참조할것)

 한국式 케어베어 사회에서는 취향과 팩트가 혼동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있다. 44피팅이 짱이라는 게 팩트처럼 주장되고, "효율적인" 사거리를 보는 방법은 취향처럼 주장되고 있다. 당연히 이런 현실은 옳지 않다.



 대한민국의 교육제도가 욕을 처먹는 이유 중 하나가 "일단 대학까지는 어거지로 왔는데, 여기에 와 보니 막상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를 모르겠다"는 학생을 양산하는 것이다. 대학생만 양산하고 책임지지 않는 교육과 사회.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케어베어 가이드가 이걸 거의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4레벨 미셔너를 기계적으로 찍어내면서. 이브는 샌드박스라는데 똑같이 생긴 두꺼비집을 찍어내는 방법만 도처에 깔려 있다. 앞으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케어베어가 되는 건 자유다. 훌륭한 케어베어가 되기 위한 방법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도 자유다. 그러나 케어베어 너머의 세계가 있다는 걸 알리고 그를 고민할 기회도 함께 제공해 주는 건, 케어베어 가이드를 배포하는 사람들의 의무다.

 신규 가입자들이여, 이브에 뛰어들어 크루저를 모는 시점 정도까지는 별 생각없이 가이드를 따라가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 스킬 찍을 시간 며칠 손해본다고 프론티어 정신이 손상될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로는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보고, "그래서 무얼 하고 싶은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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